중국의 역사 -하나라-

2024. 8. 11. 10:06역사/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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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의 시작은 황허강에서 시작된다.

 

먼저 필자는 중국의 황화 문명부터 그 이후에 생겨난 선진시대에 대해 알려주려고 한다. 본 글에선 황하 문명부터 하나라의 왕조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선진시대란 진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의 시기를 일컫는 말인데.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춘추시대, 전국시대

한 마디로 위 다섯 개의 나라기 었었던 시대를 말한다.

 

이 시기를 아주 오랜 시기라는 뜻의 상고시대(上古時代) 라고도 부르며 혹은 당시 왕조였던 하상주시대라고도 부르며 하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선 상주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대략 선진시대는 하나라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약 20세기부터 진시황이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이므로 약 1800~1700년이라는 기간이 모두 '선진시대'에 포함된다.

황허강 일대에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6000년경에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를 황화 문명이라고 부른다.

 

황하 문명은 난좡터우 문화와 츠산 문화, 페이리강 문화, 바이지아 문화, 다디완 문화로 이어졌으며 이 문화들은 기원전 5000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사오 문화로 모두 통합되었다. 양사오 문화는 농경문화가 매우 발전한 문화로 현재의 허베이성, 산시성 등 황하강 중류 유역 전역에 걸쳐 분포되었다.

 

아래 사진은 양사오 문화의 범위를 추정하고 있는 사진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이후 약 3300년경~약 2700년경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양사오 문화는 황화강 상류 유역의 현재 간쑤 성에서 마지야오 문화가 분화되었고 양사오 양식의 토기는 더 서쪽으로 뻗어나가 중앙아시아에도 영향을 주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올빼미 머리를 한 양사오 문화의 묘저강기 도기

 

이후 양사오 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 산둥반도의 재지 신석기 문화인 다원커우 문화(대문구 문화) 일부와 합쳐져 룽산 문화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 롱산 문화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기원전 2000년경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전 세대의 문화들에 비해 도자기 제작 기술에서 진일보한 문화로 도기를 돌려가며 점토를 원하는 모양으로 조각할 수 있는 도기 바퀴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출처: 금성출판사 티칭백과

란각도로 만든 룽산 문화 시기에 만들어진 고병배

 

이후 이 시대부터는 인구가 폭증하며 정착지가 도시로 발전하였고. 사람들 간의 위계질서 및 계급 차이가 명확해졌다. 특히 이때부터 사유재산이란 게 생겼으며 사회의 계층화, 부권제 사회나 계급 사회가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도시들은 유력한 수장 집단 및 그 친족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지배되었으며 몇몇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한 대도시들이 나타났다. 또한, 산동 지방을 제외하면 도시들 간의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직 '국가'라고 불릴만한 정치 체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룽산 문화 후기에는 청동기도 출현하며 이 시기엔 농업 외에도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샨시성의 웨이허 주변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양사오 문화의 시기에 비해 크게 발전되었다 쌀의 재배도 시작되었으며 누에를 기르는 양잠업의 존재와 소규모의 견직물 생산도 확인되고 있다.

 

또 동물의 견갑골을 사용한 점술과 무술 같은 샤머니즘의 흔적도 볼 수 있었다. 

이후 룽산 문화는 이리두 문화(얼리터우)로 발전했는데. 이리두 문화는 기원전 약 1900년경부터 약 1600년경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황화 중류에서 하류를 중심으로 번창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에 걸친 문화이며 중국 초기 왕조 시대의 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에는 이리두 문화를 상나라로 보았지만, 오늘날엔 상나라와는 별개의 집단으로 보고 있으며 특히 사마천의 사기에서 하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하본기에 기록된 하나라와 시기가 비슷해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로 추정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리두 문화는 이전 룽산 문화와 비교하면 더 발전된 청동기 기술, 대규모 정착지와 궁전, 그리고 좀 더 발전된 사회 체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와 동일시 여긴다면 이러한 기록에서 대충 이리두 문화(하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록들은 모두 사마천의 사기나 죽서기년 등 역사서의 기록들인데, 문제는 이 기록들이 대부분 하나라가 멸망하고 사라진 지 천 년이 넘게 지나서야 기록된 기록들로 실제로 이런 왕이 존재했는지,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멀리 갈 필요 없이 본문에서 자주 언급될 사마천의 사기는 기원전 1세기 전한 시절에 지어졌지만, 하나라는 그로부터 약 천년하고도 수백년 전에나 있었던 나라이다. 그러니 이러한 기록들은 신화적 내용도 담겨져 있어 재미로만 참고하자.

 

상서 등에 따르면 요순시대에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는데, 우의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추방당하고 죽자, 그 뒤를 이은 우가 중국 전토에 이르는 치수 사업을 벌였고, 이를 성공한 공로로 임금인 순에게 선양을 받아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인 하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여기서 순이란 인물은

중국 신화에서 최초의 세습 왕조인 하나라 이전에 중국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인물로 삼황오제 중 오제의 한 명으로 삼황오제는 세 명의 皇(임금 황),다섯 명의 帝(임금 제)를 뜻하는 말인데. 임금 황과 임금 제를 합하면 황제(皇帝)가 된다. 다만, 이때 당시엔 '황제'라는 단어가 없었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황제'의 의미로 쓰이진 않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황제는 진시황 이후부터이다.

 

또한, 순 이전에는 요라는 왕이 있었는데. 이 요라는 왕 또한 순에게 왕의 자리를 선양하였다고 하며 이 두 사람이 나라를 운영할 땐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았다고 하여 이를 '요순시대'라고 하는데. 유교에선 흔히 '태평성대'라고 부르는 시대의 예시가 '요순시대'이다.

참고로 순의 성은 '요'이다.

 

즉, 기록상에 의하면 하나라 이전에 삼황오제가 존재하였고. 삼황오제는 세 명의 황과, 다섯 명의 제를 뜻하는 말로 이들 여덟 명의 임금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삼황오제 중 마지막 제인 '순'이 '우'를 높이사 임금의 자리를 내주었고.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바로 '하나라'이다.

 

이후 상서와 사기에 따르면 하나라의 왕인 우는 죽기 전에 자신의 치수사업을 돋고, 벼농사 보급에 공을 세운 공신인 익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익은 우의 아들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를 미흡하게 본 제후들이 따르질 않았고, 이후 익은 3년상을 마치고 우의 아들인 계에게 양위하고 물러나면서 왕위 세습이 제도화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익에게 왕위를 물려 받아 왕위에 오른 계는 유호씨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복종하질 않자 감(甘)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이를 본 제후들이 계왕에게 복종하였다고 한다.

 

이후 계왕이 죽자 제3대 왕으로 태강이 올랐다. 여기서 재밌는 건 원래는 제2대 왕으로 익이 맞지만, 익은 2대 왕으로 인정받질 않아 제2대 왕인 계로부터 선양을 받은 태강이 제3대가 되었다.

 

태강은 북송의 송태종 때 편찬된 유서인 태평어람에서 인용한 제왕세기에 따르면 29년 동안 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태강이 정사는 뒷전이고 매일 사냥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자, 부락의 수령인 후예에게 쫓겨나 돌아오질 못했다.

 

또, 조선 세종 27년(1445년)에 편찬되어 조선 세종 29년(1447년)에 발간된 용비어천가의 마지막 장인 125장에 따르면 '본받지 말아야 할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강의 뒤를 이은 중강은 2대 왕인 태강의 아들이자, 3대 왕인 중강의 동생으로서 하나라의 제4대 왕이지만, 하나라의 기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기록이 매우 적은 편이다. 선대 왕인 태강이 후예에게 쫓겨나고 즉위하였다고 나오는데. 이후 중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상이 하나라 정통으로 제5대 왕으로 즉위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상은 하나라의 제5대 왕으로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자 즉위하였으며 이후 상이 죽자 그의 아들인 소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만 짧게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는 공자가 지은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의 주석서인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후예가 제3대 왕인 태강을 쫓아내고 그의 아우인 중강을 제4대 왕으로 옹립하며 후예가 권력을 장악하자 상왕이 친척인 짐관과 짐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후 후예는 상왕을 내쫓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였는데. 그 후 한착에게 배신당하여 죽임을 당하고 한착의 아들 요는 짐관과 짐심, 상왕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후예는 후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새를 사냥하는 예의 모습

예 혹은 후예, 춘추좌씨전에선 이예로 불리우는 이 인물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자 동시에 반란으로 하나라의 상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비정통 왕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재밌는 건 중국 신화의 예와 하나라의 후예는 전혀 딴판의 인물이라는 것인데. 먼저 신화 속 예에 대해 알아보자.

 

신화 속 예는 활을 아주 잘 쏘는 일종의 신으로 옥황상제 제준 고신씨와 태양의 여신 희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0명이 있는데. 이들을 태양이라 가리키고 있다. 문제는 이 아들 10명이 동시에 하늘로 떠오르자 세상은 혼란 속으로 빠지며 그 열기에 가뭄이 들고, 숨어 지내던 괴수들이 날뛰며 인계는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되었고, 삼황오제인 요가 제사를 올리자.

 

옥황상제가 예에게 이 일을 해결하라며 아름다운 붉은 활과 하얀 화살 열 개가 달린 화살통을 내주었는데, 이를 적궁백시라고 한다. 문제는 예가 옥황상제의 아들 10명 중 9명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는데. 여기서도 이야기가 또 갈라진다.

 

예는 10개의 태양이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1개의 태양만 남기기 위해 나머지 9명을 죽였다는 이야기.

예는 옥황상제의 아들들을 처음부터 죽일 생각 없이 말로 설득하려 했으나 설득이 되질 않자, 결국 아들들을 죽였다는 이야기.

그 밖에 중국 전한 시대 회남왕 안이 쓴 회남자에 따르면 삼황오제의 요가 예에게 태양을 한 명만 남기고 죽여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또, 후한 왕충이라는 인물이 쓴 논형에 따르면 삼황오제의 요가 직접 태양을 맞추어 죽였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어찌 됐든 예는 일을 마쳤으나 옥황상제 입장에선 해결을 하라 했지, 별안간 자기 여러 아들들을 죽였으니 그에 따른 벌로 예와 그의 아내 '항아'를 신에서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또 이야기가 갈라지고 이후 아까 나온 괴물들도 해치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렇게 되면 너무 글이 길어지니 여기서 짧게 마치도록 하겠다.

 

이번엔 역사 속의 인물인 후예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다음은 춘추좌씨전에서의 언급이다, 후예는 활을 매우 잘 쏘았으며 하나라의 상왕을 내쫓고 자기가 직접 왕이 되었다, 하지만,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본인은 사냥에만 몰두하고 정사는 신하 한착에게 맡기니 한착은 그가 없는 틈에 안에선 사람들에게 아부를 하고, 밖에선 뇌물을 바치며 민심을 흔들어놓자 군중들이 이에 동조해 하나둘씩 후예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사냥에 나간 후예는 이 사실도 모른채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날에 살해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한착은 예의 아내였던 현처를 아내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만 보면 한척이 왕을 죽이고 왕의 아내까지 단순히 빼앗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일화가 있는데. 현처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순호, 현호이며 원래 현처는 후기의 아내로 유부녀였으며 둘 사이에 백봉이라는 아들까지 있었지만, 후예가 강제로 아내로 삼고 현처의 아들인 백봉까지 죽이자 현처는 이에 원한을 품고 한착과 결탁해 후예의 죽음에 관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한착과 결혼하여 둘 사이에서 요와 희라는 아들들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이렇게 재위에 오른 한착 또한 거짓과 술수에 의존하며 백성을 덕으로 다스리지 못하였고, 아들 요와 희에게 군사를 내주어 영토 확장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 상의 아들이었던 소강을 추대하는 제후 세력들에게 한착과 그의 아들들은 살해당했고 이후 제6대 왕으로 소강이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제5대 왕인 상왕을 내쫓고 오른 후예가 순서로만 따지면 제6대 왕이 맞으나 이는 비정통으로 보고, 한착 또한 비정통으로 보기 때문에 소강이 제6대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라의 제6대 왕인 소강

소강은 아버지 상이 후예에게 내쫓기며 죽임을 당하자 상의 아내였던 유잉씨가 하수구도로 빠져나가 친정으로 탈출해 소강을 낳았다고 기록되어 잇다. 이후 유잉가에서 가축을 돌보다 한착의 아들인 요에게 추적을 받고 유우로 도피했다 유우씨의 딸과 결혼하여 힘을 모았는데. 아마 필자가 추정하기로 유우씨는 당시 하나라에서 세력이 조금 있었던 호족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 소강은 힘을 모으는 한편, 한착의 아들인 요에게는 첩자를 보내고 또 다른 아들인 희를 꾀어내는 등의 작당을 벌이고 이후 한착과 그의 아들들을 죽이며 한동안 쇠퇴했던 하나라를 다시 부흥시켰다고 한다.

 

또 쉰 쌀밥이 발효되는 것을 보고 술 빚는 양조법을 터득해 오늘날 중국에선 술을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제7대 왕인 저의 모습을 그려낸 벽화

이후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소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저가 제7대 왕으로 왕위에 올랐고, 저가 사망하자 저의 아들 괴가 제8대 왕으로 왕위를 이었다고만 짧게 기록되어 있다.

 

다른 기록인 세본에는 저왕이 갑옷과 보호구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저자가 안 알려진 죽서기년에는 저가 하나라의 도읍(수도)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제8대 왕인 괴

저의 아들 괴는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아버지 저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만 존재하지만, 죽서기년에는 무려 44년동안 재위했다는 기록과 즉위 3년이 되어갈 때 구이(九夷)라고 불리는 중국 동남부에 위치한 9개의 부족들이 하나라에 내방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제9대 왕인 망

망은 하나라의 제9대 왕으로 성은 사씨고, 휘는 망으로 이름이 '사망'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괴가 죽자 그의 아들 망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죽서기년에는 58년 동안 재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죽서기년은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대나무'에 '편년체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데, 이를 급총기년 혹은 급총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죽서기년은 삼황오제의 시대부터 전국시대 삼진 분립 후의 위나라 양왕까지의 연대기가 기록된 책이다.

 

설은 하나라의 제10대 왕으로 하나라의 제9대 왕 망의 아들로 망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설이 죽자 제11대 왕으로 설의 아들 불강이 왕위에 올랐는데. 불강은 하나라에서 제일 긴 재위 기간(약 59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죽서기년에는 재위 6년 때 구원(九苑)을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구원(九苑)은 아마도 괴의 즉위 3년 때 구이(九夷)라고 불리는 9개의 부족들이 하나라에 내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괴 시절에 내방한 구이와 불강 시절에 토벌된 구원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불강이 죽자, 제12대 왕으로 경이 왕위에 올랐는데. 경은 불강의 아들이 아닌 제10대 왕인 설의 아들로 불경에게 있어서는 '동생'인데, 수백 년간 대부분 전왕의 아들들이 왕위를 이었던 하나라의 정통성에 있어서 왕의 동생이 왕위에 오른 몇 안 되는 사례이다.

 

물론 하나라의 초대 왕이었던 우의 신하였던 익이 잠시나마 왕위에 올랐지만, 인정받질 못하였고 이후 우의 아들인 계가 제2대 왕으로 올랐었고, 제3대 왕인 태강이 쫓겨나고 왕위에 오른 제4대 왕 중강의 사례가 있지만, 이는 반역으로 인해서 일어났다는 점을 보면 굉장히 특이한 사례인데.

 

특히 불강이 59년 동안 왕위에 올랐는데, 그의 동생인 경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도 놀라운데, 경은 왕위에 오르고 하나라를 21년간 통치했다는 점. 이는 오늘날 영국의 여왕이였던 엘리자베스 2세가 96세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찰스 3세가 73살이란 나이에 영국의 제5대 국왕으로 오른 것과 대조된다.

 

참고로 제11대 왕인 불강의 아들은 제14대 왕으로 오르는데, 불강이 죽기 전에 낳았다고 치더라도 경이 제12대 왕인 약 21년간 통치했다고 알려졌으며 제13대 왕인 근은 20년이다. 그럼 최소 공갑은 아무리 못해도 50대쯤에나 왕위에 올랐을텐데. 공갑은 또 약 31년간 하나라를 통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거나 경이 죽은 뒤에는 경의 아들 근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13대 왕인 근은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또 근이 죽은 뒤엔 사촌 공갑이 근의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제왕세기에는 약 20년간 재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여기서 또 근의 사촌동생인 공갑이 왜 근을 이어서 왕위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적혀있질 않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죽서기년에 따르면 근이 왕위에 올랐을 때 하늘에 10개의 태양이 떠오르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적혀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예'가 죽인 옥황상제의 10명의 아들들(태양)을 의미하는 것 같다. 다만, 신화 속 인물인 예가 옥황상제의 아들들을 죽인 시기는 근이 왕위에 오르기 한참 전의 일이며 그 신화에 따르면 옥황상제의 10명의 아들들(태양들)이 하늘로 떠오르자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가뭄이 일어났으며 괴수들이 날뛰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그렇다면 근왕의 재위 시기는 하나라가 크게 혼란이 있었던 시대였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하나라의 제14대 왕 공갑

공갑은 하나라의 제14대 왕으로 제11대 왕인 불강의 아들이다. 대체 몇 살때 왕위에 오른지가 의문이지만.. 공갑의 기록은 굉장히 나쁘게 기록되어 있다. 사치를 즐기며 성격이 방탕하고 당시 하나라를 따랐던 제후들이 굉장히 싫어했던 왕으로 기록된다.

 

또, 여기서 민간전승이 언급되는데. 공갑은 어느 날 용 한쌍이 하늘에서 내려오자 점을 쳤는데, 점괘에 의하면 용의 침을 받으면 길한 일이 있을 것이라 하여 공갑이 용의 침을 받게 하자, 이 침으로부터 훗날 주나라의 경국지색 포사가 태어났다는 민간전승이다. 문제는 이 공갑이라는 인물 이후 하나라는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제15대 왕인 고왕은 공갑의 아들로 아버지 공갑과는 달리 명군이라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어째서 명군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또, 명군이라기엔 공갑 이후 급속도로 쇠퇴한 것으로 추정되는 하나라 역사를 보면 과연 명군인가? 싶다.

 

이후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고왕이 죽자 그의 아들 발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걸왕의 형이라는 얘기도 있다. 발왕이 즉위할 땐 국력이 너무나도 쇠약해져 주변 제후들이 그를 따르질 않아 방문하지 않았으며 여러 이민족들이 찾아와 문전에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역사상 최초 기록된 지진인 태산진이 발왕 재위 7년경에 일어났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태산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태산은 중국의 타이산을 의미한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제17대 왕, 걸왕

걸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아버지 발왕이 죽자 재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제걸 때 공갑 이래로 제후들이 하를 많이 배반했는데, 걸은 덕에 힘을 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들을 해치니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만 봐도 폭군이란 걸 알 수 있는데, 사실 걸(桀)이란 표현은 후에 폭군이라는 뜻으로 붙인 것으로 기록에는 웅장한 궁전을 짓고 금은보화와 미녀를 모아 궁전 뒤뜰에 강을 만들어 그곳에서 뱃놀이를 즐기며 장야궁을 건설해 그곳에서 유흥과 향락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특히 아내는 '말희'라는 여인인데,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졌으며 산동 유시씨의 딸로 걸왕이 그곳의 사람들을 지배시켜 멸망하자, 복수를 위해 일종의 미인계로 걸왕을 타락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걸왕한테 주지육림과 거대한 궁궐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주지육림

이후 이러한 걸왕의 정치에 백성들은 불만이 가득하였지만, 걸왕은 자신의 정치에 흡족해하며 '내가 천하를 다스림은 저 하늘에 해가 떠 있는 것과 같으니, 저 해가 끝날 때라야 내 다스림도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時日害喪 저놈의 해는 대체 언제쯤 사라지느냐?

予及女偕亡 내 저놈과 같이 사라지고 말지.

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후 국력이 쇠퇴하고 제후들이 배반하고 신하들의 충언을 무시한 채 폭정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걸왕은 자리라는 남자를 불러 하대라는 감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자리'가 바로 상나라의 초대 왕이자 태조인 '탕왕'이다.

상나라의 태조, 탕왕

자리는 덕으로 민심을 다스렸고, 이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세력을 크게 불리며 명재상 이윤의 보좌로 명조전투에서 크게 대승을 거두며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쫓아냈다고 한다. 이후 걸왕과 말희는 함께 추방당했고, 명조로 달아났으나 결국 거기에서도 추방되어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죽기 전 걸왕은 사람들에게 '내가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걸왕이 죽은 뒤 탕은 천자가 되어 '상 왕조'의 시대를 열었고 하 왕조의 후손들은 상 왕조에서 제후에 봉해졌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걸왕은 하걸은주라 하여 상나라의 폭군인 주왕과 묶여 불리며 주로 두 글자로 줄여서 '걸주'로 칭해지며 폭군의 대명사로 일컫기 때문에 항상 역대 중국 왕조에선 폭군이나 망군을 '걸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황하문명부터 시작한 하나라의 역사를 마치며 다음 글에선 상나라(은나라)의 역사에 대해 다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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